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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신성욱 교수" 미주교회신보2022.07.07
    [1]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무얼 선택할까? 성경적으로 말하면 악을 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왜 악을 즐겨 택하는 걸까? 그건 루터의 말처럼 인간 안에 '구부러진 마음'(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위험이 초래될 거 같은 상황에선 선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 참 많다. 소극적인 죄를 짓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2] 가끔씩 이것을 반전시키는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전철 안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노인들에게 행하는 막말이나 볼썽사나운 행동이 담긴 영상을 접할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중학생처럼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욕을 하면서 마구 때리는 영상이 올라왔다. 주변에 있는 누구도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3] '아, 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물밀 듯 몰려왔다. 바로 그때 영웅이 나타났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와서는 그 남학생을 꾸짖으며 할아버지가 맞지 않도록 온 몸으로 막아준다.그래도 해결의 기미가 없자 청년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음 정거장에 같이 내렸다. 그 광경을 영상으로 찍으면서 같이 내리던 한 사람이 청년에게 묻는다.[4]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느냐고? 그때 청년은 울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나서요!"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나, 그 청년은 유일하게 할아버지가 젊은 애한테 당하는 걸 막아주었다. 이유는 뭘까? 자기 할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이와 흡사한 충격적인 실화가 하나 있다.[5] 2015년 7월,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열두 살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리엘 에스칼란테 페레즈이다. 그는 수업 후 집으로 가던 스쿨버스가 갱단에게 납치되는 사건을 겪는다. 갱단 조직원은 그에게 권총을 주며 버스 기사를 쏘면 살려 주고 안 쏘면 너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소년은 끝내 총을 쏘지 않았다.화가 난 갱들은 다리로 가서 그를 던져 버렸다.[6] 135미터 높이의 다리였다. 그는 사흘 뒤 온몸이 부서진 채 발견되었지만, 기적같이 숨은 붙어 있었다. 아리엘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버지를 꼭 껴안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5일 후 눈을 감고 말았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아리엘은 갱들의 위협을 거부하고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했다. 이럴 경우 압도적인 다수는 제 목숨 살리려 버스 기사를 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다.[7] 과거 미국 유학 시절 대한민국을 온통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지존파 사건'이 떠오른다.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만든 살인 아지트에 끌어와서 총으로 쏴 죽여서 불태우는 끔찍스런 일당들에게 한 부부가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학교 선배 교수가 다니던 교회의 신앙 좋은 부부였다. 살인마들은 거기 끌어온 처녀 한 사람에게 총을 주면서 그 부부를 죽이라고 했다.[8] 어찌 됐을까? 이 처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두 눈을 꼭 감고 그 부부를 죽였다. 나중에 그녀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살인마 한 명과 병원으로 가던 중 도피해서 경찰에 신고함으로 그들의 전모가 밝혀지긴 했다. 그랬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남의 생명을 살려주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그런데 어째서 아리엘은 갱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을까?[9]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자기 아버지도 버스 기사였다. 자신이 탄 버스의 기사가 아버지라 생각하니 쏠 수가 없었던 것이다.이게 바로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이 가져다주는 대단한 힘이다. '공감'(共感, symphony)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없었더라면 누구도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목숨과 바꾸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10] '생명경시'의 현상을 사회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이 외면되고 있는 현실을 자주 본다. 대상이 내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남기신 이유가 뭘까? 제한되고 편협 된 이웃의 개념을 깨기 위해서이다. 피를 섞은 사마리아인이나 창녀나 죄수나 한센씨병 환자나 강도나 살인자나 일본 놈이나 주님 눈에는 모두가 자기 양들이다.[11] 부모나 형제나 가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용서 못할 이가 없고, 사랑 못할 이가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자기 눈앞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만이라도 자기 가족 중 한 사람과 동일시 할 줄 아는 관점이 필요하다. 다른 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차별화 된 용기'는 그럴 때 발휘가 되는 것이다.빌 2:3~4절의 말씀대로 잘 살아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12]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출처 기독일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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