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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 장로정치 한계로서 J. A. Hodge

작성일 :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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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운 목사 웨스트민스터장로교회

누군가 자신을 안다는 것은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하나님에게서 배운 우리란 지독한 한계에 갇힌 ‘결핍 덩어리’다. 이를 알지 못하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대한 의식(意識)은 처참한 자기가 버려지면서 생기는 기적이다. 알게 된 한계의 틈을 부지런히 찾아내어 근신하며 성실하게 매워가지 않으면 도무지 생명이 될 수 없는 존재다. 우리에게는 ‘멈춤’이란 것이 없다(살전 5:15-18). 자람과 퇴보, 차든지 덥든지만 있을 뿐이다. 양쪽 다 걸친 것은 중간이 아니라 퇴보에 속한다(창 4:7). 선 줄로 안 즉시 넘어질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전 10:12). 너무도 선한 마음을 품었음에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결정에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으면 주께서 사탄이란 칭호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음도 기억해야 한다. 자기(인간 혹은 역사적) 방식대로 일을 돌아보는 그 치명적인 결함 말이다(마 16:23).


그러므로 우리의 한계를 말하는 것에 불쾌해하지 말자. 그리스도께서 교회, 특히 정치적으로 장로회를 모으시는 목적도 교회에 묻어 있는 결핍과 치명적 한계의 종자(種子)인 ‘죄’를 찾아 제거하시는 것에 있지 않은가. 칭찬보다 잘못에 대한 권징이 목적인 치리회다. 하고 싶은 대로, 좋아 보이는 대로 하도록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 자신이 다른 자에게 준 적이 없으므로 자신의 역사로만 취하시는 그의 사역의 시작, 말미암음, 결과임을 분명히 하고 이에 충직해야 함을 짚고 가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교회법의 정치·권징 부문은 웨스트민스터 총회 문서들보다 J. Aspinwall Hodge의 ‘장로교회 법규란 무엇인가(What is presbyterian law/한역서: 교회정치문답조례, 1968)’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각 장과 조의 순서, 제목, 내용에 있어 거의 그대로가 오늘날의 보수적인 예장 교단들의 교회법에 반영되어 있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이 제정될 당시(1907년 기준) 그 원형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정치모범, 예배모범 등에 근간하여 채택하려 했지만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12조목에 그침), 인도 장로교회의 24신조(1890)를 요약하는 수준에서 멈췄으며(12신조), 이후로 많은 수정과 채용을 반복하다가 곽악련(Charles Allen Clark) 씨가 최초 번역(예수교 장로회 정치문답조례, 1917)한 Hodge의 이 책을 초기 한국교회에서 채용(1918/제7회 총회)한 후 역시 수정·개정이 되었고, Hodge의 진본이 사라진 채 1968년(제53회 총회)에 이르러 재번역(박병진) 출판한 것이 현대 ‘장로교회 정치조례’의 초석이 된 형태다. 


그러나 앞서 약술한 대로, 한국장로교회 정치조례의 표준처럼 되어버린 이 역서(譯書)는, 오늘날과 같이 교회직원의 칭호를 직무나 직임적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부른 것이나, 치리회에 회장의 개념을 도입(moderator-의장을 회장으로 번역)한 것 외에 법리적 용어와 형식을 많이 사용함으로 인해 장로회 본래 신앙정신에서 상당히 벗어나게 하는 배후가 되고 있어, 지금은 이것을 거절하지 않는 한, 그 이전을 돌아보거나 신적 기원을 갖는 성경적 장로회 정치를 주장하고 논하는 데로 들어가기에 심히 큰 어려움이 있는 실정이다. 


Hodge의 책은 미국에서 1882년에 작성되었는데, 역자(박병진) 자신이 밝히고 있듯 1968년 한국장로교회에 채용된 역본은 당시 우리 형편에 맞게 손을 대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하겠다. 시기적으로 우리가 받은 미국장로교회의 유산들은 다양하게 일으켜진 그들의 국가적 상황들과 맞물려 교회의(교파 간) 분리와 연합, 그에 따른 선교정책, 교회규범 재 수립 등에 의해 이미 오염(첨삭과 수정)이 가해진 상태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우리 형편까지 더해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유럽 개혁교회가 장로정치에 다소 무관심한 반면, 미국 장로교회는 너무 법리적이라는 특징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법리란 세속법적 이치의 도용인데, 우리는 이 후자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다. 


교회의 법리는 교회법에 수록된 웨스트민스터 총회 문서들의 내용임을 분명히 하고, 이에 벗어나 세칙과 규칙을 따로 두는 것 자체가 정치의 세속화임을 인지해야 한다. 미국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궁극적인 신학과 정치에 이르지 못하는 어떤 장벽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푯대가 아닌 중간의 이정표 같은 것을 붙잡고 푯대를 대신하려는 게으름을 갖게 되었다. 거기서 머물며 더 들어가기 싫어한다. 난해하며 고난까지 보장되어 있어 전진을 회피한다. 이 폐단은 장로회 정치를 배태(胚胎)한 신학에서 선행되어 교회 세속화의 두드러진 현상으로 남아있다. 


  이런 여건에서 시작된 우리의 실상을 보면서, 자존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바른 교리 전도(공적 설교)를 위해 교회의 정치질서를 어떻게 세워가야 하는지를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을 통해서 다시 배우기를 바란다. 한계로 제시된 앞의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라, 신조와 분리시킨 지금의 정치부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바른 정치는 신조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는 신조(신학)에 종속된다. 



(출처 한국교회신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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